나의 이야기

바람의 목회

쨍쨍하늘 2020. 9. 30. 07:30

 

        바람의 목회

                                    천서봉

 

 

붉은 창문들 저무네.

거리엔 부옇게 물길이 번지고

벗겨진 대지의 표면이 비늘처럼 흘러가네

햇살의 따가운 못질 뒤에도

나무들은 자꾸만 제 잎 쥐고 휘청거리네

 

버려진 오르간처럼 켜켜이 쌓인 

공사장 파이프들이 저녁을 연주하네

노을 따위를 발음하면 

삶은 늘 뿌리부터 뒤척인다고

저기 어깨 둥글게 웅크려

철야기도를 준비하는 가로수

 

공중을 만지는 평화로운 연기를 보네.

바람은 오후 6시를 읽는 기술, 혹은 복음.

흔들려야지 흔들려야지

깃대처럼 골목에 나를 꽂아두네

떨어져 빈나뭇잎 자리까지

다만 모든 것이 바람의 영역이네

 

늦은 상점의 문이 스르륵

밀렸다가 절로 닫히네

누구일까 누구일까

어둠의 긴 목이 자꾸 기울고

사람들은 정물처럼 늙어가네

모두 바람의 존재를 믿었지만 

아무도 그 뼈마디를 보지 못하네

푸르르

 

저마다의 십자로를 건너는 시간,

허파꽈리처럼 웅크려 핀

생의 바람꽃들 지천이네

자라 자라 

잠들지 않는 한밤의 환한 집회를 보네

 

 

*********************************************************

 

 

 가을을 부르는 9월이건만

첫날부터

폭염과 열대야의 기승.

최장의 비를 무르자 

서쪽으로 덮친 태풍에 휘청대던 날이

(고작) 며칠 새

이번엔 동쪽으로 세차게 

또 태풍 마이삭이 올라온다고..

때는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상태인 백중사리

태풍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된단다.

그리고

바로 하이선이라는 태풍이 또 올라온단다.

올해는

여러가지로 수난 연속이다.

 

 첫 주 일요일

태풍 하이선이 영남을 또 강타하고

동해 쪽으로 틀어 북상할 것이란다.

서울은 두 번의 태풍 위기에서

숨 고르기를 할 수 있었지만

영남 쪽 피해는 엄청났다.

그런 바람몰이 이후 밤,

여반장마냥 

이불을 끌어모으게 하는 것이

가을로 홀랑 옮겨간 듯하더니

새벽녘을 넘어가는 6시에도

어둑함이 남아있다.

음력 절기의 오묘함이다.

서늘한 아침

도시의 파도 소리도 쌔애하다.

 

 블로그의 포맷이 바뀌고는

나의 오래전 블로그 시작의

글의 정렬, 크기들이 제 멋대로다.

(뭣보다) 글질들이 엉망이다.

화끈거림에 주춤..

그러나

Delete 대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자성이 필요할 때마다 열어보려고..

 

 금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과자를 세 봉지나 샀다.

스트레스를 빠샥하게 부셔버릴 참으로.

혼자서

콜라랑 아삭아삭 먹어댔다.

이런 나를 보고

가족 중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뒷골도 땡겼다.

"아고오 해골이야.."

이번 일주일 내내 본격적으로 지쳤다.

나를 보는 모든 이들이

지쳐 보인다는 위로의 인사를

나눠주는 한 주였다.

아침을 아이들과 보내고 나면

무지 시장하다.

이젠 구경만 하던 학교 급식을 먹는데

시장이 반찬으로 꿀맛이다.

최저시급의 기간제 선생질.

 

 새로이 맞는 주말 아침.

추적추적 빗소리에 잠을 깼다.

늘 그렇듯 6시 무렵.

샤워기가 본능적으로

온수 쪽으로 기운다.

그래도

아이스커피가 당기는 아침이다.

 

 둘째 일요일 아침.

앞 동 베란다에 반사된 햇빛은

연노랑으로 활짝 퍼지면서

선선함을 더해 싱그러움을 뿜어낸다.

어제 늦은밤 시작한 영화,

아침에 일어나서 끝냈다.

Iain Reid 원작에 찰리 카프만 감독 영화,

'이제 그만 끝낼까 해'

(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크게 기대 안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첫 대사부터 마구 끌려서..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내 머리를 계속 지배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다

먹을 때, 잠자리 들 때,

잠잘 때, 깨어날 때

늘 그 생각뿐이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건 아니다

언제 시작됐더라?

새롭게 빚어낸 생각이 아니라

내 머리에 박혀있던 거라면?

입 밖에만 내지 않은 거라면?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끝이란 항상 이런 것인지도

'때로는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과 현실에 가까워'

'말과 행동은 속여도

생각은 그럴 수 없거든'

도로는 텅 비어있다.

주변은 조용하고 적막하다

예상보다 더 그렇다

볼 건 많지만 사람은 적고

빌딩과 주택도 별로 없다

하늘

나무, 들판, 울타리

도로와 자갈 갓길

 

 .......

하늘좀 봐!

이제 그만 끝낼가 해.

사람은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뉴턴의 감정 제1법칙이랄까

 

     bone dog

       (개 뼈다귀 같은..?)

 

집에 오는 건 끔찍하다

개가 얼굴을 핥든 말든

아내가 있든

아내 형상의 외로움만 기다리고 있든

집에 오는 건 끔찍하게 외롭다

그렇기에 조금 전까지

머문 곳의 억압적인 기압을

애틋한 마음으로 떠올린다

집에 오면 모든 게 더 나빠지니까

풀 줄기에 달라붙은

해충을 생각한다

도로에서의 오랜 시간

길가 차량 지원, 아이스크림

어떤 구름의 특이한 모양

돌아오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움으로 침묵한다

그렇기에 조금 전 

머문 곳의 억압적인 기압을

애틋한 마음으로 떠올린다

 

집에 오는 건

너무 지독하다

가정식 침묵과 구름은

단지 전신 권태에만 기여한다.

그런 구름은 사실 수상쩍다

네가 두고 간 것과는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다

너 자신도

다른 흐린 천에서 잘려졌고

돌아왔고

싸게 처분됐고

달빛을 못 받았고

돌아오는 게 불행했고

엉뚱한 곳들에서 태만했다

슬기있는 정장은

행주처럼 추레하고 낡았다

달에 착륙하듯

낯설게

지구의 중력

두 배가 된 노력

구두 끈을 질질 끌고

어깨를 당기며

걱정의 스탠자를

이마에 더 깊이 새긴다.

어둠이 깔린 집으로 돌아온다

메마른 우물은

연약한 가닥에 의해

내일로 이어진다

어쨌든

같은 날들의 맹공격에 한숨 쉰다

한 번에 하나씩이면 좋겠다

어쨌든, 넌 돌아왔다

해는 지친 창녀처럼

오르락내리락하고

날씨는 부러진 사지처럼

미동이 없는데

넌 계속해서 늙어가지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지만

네 몸속 소금의 조수만 움직인다

네 시야는 흐리다

넌 네 날씨를 지니고 다닌다

커다란 대왕고래 골격의 어둠

넌 돌아온다

투시력을 가지고

네 눈은 갈망이 되었다

넌 돌연변이 선물을 들고

집으로 온다

뼈의 집으로

지금 네가 보는 건

뼈.

 

  .........

''는 만능 감탄사야.

방금 깨달았어

마음에 들었다는 건지

얼마나 쓰레기인지

묘사할 말이 없다는 건지

 

  .......

나아지지 않을 걸 인간만 알기에

생겨난 걸지도 모른다.

자기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아는 동물은

인간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은 현재에 산다

인간은 그럴 수 없기에

희망을 발견한 거다

 

 호러,공포로 분류된 영화.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 Vs 머문 자리의 익숙함.

단조롭고 무기력하여

상상에 매달리는 지친 삶은

현실과 상충하여 호로이며 공포인가?

안타깝게도

주인공에게는

또다른 내일의 태양마저

진전없는

무기력하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래서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 상자 같은

책을 들게 한 것이 독이었을까?

하여

생긴대로 주어진대로 살다

운명의 시간을 받아들였어야 할

금단의 영역 침입죄가 적용된 것인가.

인간의 시초라는 것이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알게된 부터인 것을!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인간

영리와 사악을 더한 영악함으로

도전을 일삼는 삶을 독려하며

21C에 닿았는데..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를 연 순간

몰랐더라면 좋았을 자신에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고통에 시달리다

결국은 

운명 거역의 대역죄

suicide를 범하는데

신에 대한 최악의 도발인가?

자업자득의 엄중한 심판인 것인가?

예수의 보혈을 묻다.

 

 나누고 싶은

일명 지적 대화는

단조로운 삶의 염증으로부터

무엇이 되고픈 일상을 상상하는

도구와 수단이 되어

비현실의 수렁에서 (슬픔을 더하면서도)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일.

그 지루함의 막막한 통증

나아가

나를 인정해주는 다수의 무리 속에서

나의 인생을 여미고 싶은 욕구는

오히려 

더욱 처참하고 외로운

생존의 여정을 떠안았다.

 

 책의 내용을 모르고는

이해불가거나 작가가 전한

내용을 빗나가 내 식대로 생각했을..ㅜ

여기저기 원작의 내용을 뒤졌다.

그리고 이해.

당장 읽고 싶었던 이 책은

번역판이 없다.ㅜ

 

 제목은 

주인공 제이콥의 지친 삶을

마감하는 뜻이었다.

두 장면의 기억.

약자의 억압 분출 또한

상상에만 그쳐있어 그럴까

무력을 행사한 피의 연출은

무게감이 더해지지 않은 채

블랙코미디처럼 전달되고

엔딩은 감독이

온통 쓸쓸하기만 했을 아웃사이더의

인생에 안타까운 위로상을

주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라는 

詩의 해석판이었다.

 

 서늘한

9월의 끝자락 주말 아침

뜨신 커피를 만들었다.

그럴싸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전부같은 공부의 길은

코로나로 더욱 심화된 

양극화를 부르고

빈부의 격차(의 씨앗이 되기도 하는)만큼

악재의 악재를 빚고 있다.

부모로부터 증여받은 환경 연장 

즉 꿈나무들의 유산.

난 맨땅에 헤딩하는 아이들을

매일 끌어안고 있다.

공부가 싫다는 아이들.

왜 쉬어야 할 시간에

내 옆에 와서 앉아야 하는지

시작도 전에

불만투성이로 과부하에 걸리는 아이들.

그럼에도

난 너희들의 역전을 바란단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다.

정확히는 나만 믿어버린 도끼다.

물론

그 믿어버린 도끼도

나를

음해할 의도를 가지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그들의 모임에 끼고 싶지 않은

이유를 명백하게 말해버린 것을

나름은 돌려치기로 전달한 모양인데

듣는 쪽 상대가

너무 잘 알아들어버린 결과 같다.

(나의) 해명을 하자면

다름의 차원이라

그들과 내가 사적으로

어울리지만 않는다면 문제 될 게 없고 

공적인 관계에서

눈알을 굴려댈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일뿐이었다. 

나의 아무렇지도 않은,

공적 예의를 갖춘 친절이

빈정 상한 그들을 열받게 한 모양이다.

하여 나는

원래도 친한 그들이

더욱 가까워질 계기마련의 타깃거리인

공공의 적이 되버렸다.ㅜ

발단은

나에게 있는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과 어울리는 일도 싫으니

개선의 여지는 없는 것이고

충돌을 피하는 일이 최선인 관계다.

원인관계가 파악되니

자꾸 웃음이 나면서 개운하기도 하다.

While

싸움거리도 안되는 이들에게

반격할 생각은 없었다.

믿어버린 도끼한테는

'왜 그랬니?' 지만

시침 떼고 엄포(?) 한자락 날렸더니

나 붙들고 도둑이 제발 저려하는 모양새다.

게다가

다 알아버려 평정심 찾은 내게

주제라곤 완장 채워주니

행동대장 자처하고 나서다 사고칠 주제 즉

쨉도 안되는 게 익숙한 도발을 걸어왔다. ㅋ

그래서

'너희들하고 어울리기 싫다니까..'

나 함부로 건들지 마요!

알고는 안 당해요.

살면서 정말! 겪고 싶지 않은

유치찬란한 해프닝.

 

 9월의 마지막 날.

언니네랑 추석 장을 함께 봤다.

돌아오는 길

교보문고 현판의 글귀

시인과 촌장의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나의 제자리는 어디인가?

 

 안녕, Sep. 2020.

나는 80년생의 젊은 작가 

I. Reid를 격하게 질투한다.

그래서 9월의 이별곡은 

장현의 ♬) '미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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