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바가지」
박완서
쾌적한 날씨였다.
그런데도 우린 둘 다 달군 프라이팬에 들볶이고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을 못했다.
막걸리를 병째 마시는 그가 조금도 호방해 보이지 않고
조바심만이 더욱 드러나 보이는 걸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곁눈질했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달랠까요?”
“당신 시장하오?”
“아뇨, 당신 술안주 하게요.”
"안주는 무슨……”
나는 주인을 찾아 가게터 뒤로 돌아갔다.
좀 떨어진 데 초가가 보였다. 초가지붕 위엔 방금 떠오른 보름달처럼 풍만하고
잘생긴 박이 서너 덩이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보. 저 박 봐요. 해산바가지 했으면 좋겠네.”
나는 생뚱한 소리로 환성을 질렀다.
“해산바가지?”
남편이 멍청하게 물었다.
“그래요. 해산바가지요.”
실로 오래간만에 기쁨과 평화와 삶에 대한 믿음이 샘물처럼 괴어오르는 걸 느꼈다.
내가 첫애를 뱄을 때 시어머님은 해산달을 짚어보고 섣달이구나, 좋을 때다.
곧 해가 길어지면서 기저귀가 잘 마를 테니, 하시더니
그해 가을 일부러 사람을 시켜 시골에 가서 해산바가지를 구해오게 했다.
“잘생기고 여물게 굳고, 정한 데서 자란 햇바가지여야 하네.
첫 손자 첫 국밥 지을 미역 빨고 쌀 씻을 소중한 바가지니까.”
이러면서 후한 값까지 미리 쳐주는 것이었다. 그럴 때의 그분은 너무 경건해 보여
나도 덩달아서 아기를 가졌다는 데 대한 경건한 기쁨을 느꼈었다.
이윽고 정말 잘 굳고 잘생기고 정갈한 두 짝의 바가지가 당도했고,
시어머니는 그걸 신령한 물건인 양 선반 위에 고이 모셔놓았다.
또 손수 장에 나가 보얀 젖빛 사발도 한 쌍을 사다가 선반에 얹어두었다.
그건 해산사발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낳은 첫아이가 딸이라는 걸 알자 속으로 약간 켕겼다.
외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흔히 그렇듯이 그분도 아들을 기다렸음직하고 더구나
그분의 남다른 엄숙한 해산 준비는 대를 이을 손자를 위해서나 어울림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원한 나를 맞아들이는 그분에게서 섭섭한 티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잘생긴 해산바가지로 미역 빨고 쌀 씻어 두 개의 해산 사발에 밥 따로 국 따로 퍼다가
내 머리맡에 놓더니 정성껏 산모의 건강과 아기의 명과 복을 비는 것이었다.
그런 그분의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아름답던지, 비로소 내가 엄마 됐음에 황홀한 기쁨을 느낄 수가 있었고,
내 아기가 장차 무엇이 될지는 몰라도 착하게 자라리라는 것 하나만은 믿어도 될 것 같은 확신이 생겼다.
대문에 인줄을 걸고 부정을 기(忌)하는 삼칠일 동안이 끝나자 해산바가지는 정결하게 말려서 다시 선반 위로 올라갔다.
(……)
다음에도 딸이었고 그 다음에도 딸이었다. 네번째 딸을 낳고는 병원에서 밤새도록 울었다.
의사나 간호사까지 나를 동정했고 나는 무엇보다도 시어머니의 그 경건한 의식을 받을 면목이 없어서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고 경건했다. 다음에 아들을 낳았을 때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똑같은 영접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분은 어디서 배운 바 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저절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분이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그분의 여생도 거기 합당한 대우를 받아 마땅했다.
나는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 그분의 망가진 정신, 노추한 육체만 보았지
한때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이 깃들었었나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 빈 그릇이 되었다 해도 사이비 기도원 같은 데 맡겨
있지도 않은 마귀를 내쫓게 하는 수모와 학대를 당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이 막걸리병을 다 비우기도 전에 길을 재촉해 오던 길을 되돌아섰다.
암자 쪽을 등진 남편은 더이상 땀을 흘리지 않았다. 시어머님은 그후에도 삼 년을 더 살고 돌아가셨지만
그 동안 힘이 덜 들었단 얘기는 아니다. 그분의 망령은 여전히 해괴하고 새록새록해서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효부인 척하는 위선을 떨지 않음으로써 조금은 숨구멍을 만들 수가 있었다.
(……)
임종 때의 그분은 주름살까지 말끔히 가셔 평화롭고 순결하기가
마치 그분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날 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그분의 그런 고운 얼굴을 내가 만든 양 크나큰 성취감에 도취했었다.
● 출전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4권, 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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