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툰 이야기 다서엇. 깨진 그릇에 손을 베이고 나서야 배우다 *
박광수
우정이라는 그릇,
사랑이라는 그릇,
믿음이라는 그릇,
신의라는 그릇,
그 그릇들은
언제나 소중히 다루고
잘 닦아야 하며 깨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각각의 그릇들은
품안에 있을 때는
모두 아름답고 견고해보이지만,
행여
잘못 다뤄 깨지기라도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깨지기 전의 그릇은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깨진 그릇은
여지없이
칼날이 되어 내게 향하기 마련이다.
뒤늦게 후회하며
깨진 그릇을 어떻게든 붙여보려고 애쓰다
손을 베이면
그제야 비로소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품안에 있을 때 소중히 여길 것,
깨진 그릇에
손을 베이고서야 배운다.
***********************************************************
2월이 왔다.
두녀석 모두 개학하여 내보낸 아침,
나도 서둘러 거리로 나섰다.
뭐야?
그세
봄이 오고 있는 거야.
뭔 겨울이라는 날씨가
봄바람 같은 거야.
정신이 번쩍 들게,
머리 속을 차갑게 관통할만큼
쌩한 강추위를 맞고 싶었는데..
1월 한달
바깥과 담 쌓고 사는 동안
겨울은 맥아리 없이
봄기운에 퇴진중이었나 보다.
거리를
휘익 돌아
단골 미용실을 찾았다.
나는
머리 숱도 많고
뜨는 머리라 층을 내고
숱을 쳐내지 않으면
넘 부우~해서 답답해 보인다.
숱을 쳐내도
한달에 한번은
미용실을 들러야 하는..
그런데
평균의 비용을 내야하는
미용실들은 그렇게
숱을 쳐내면
머리가 더 떠서
안된다고 우기고(?)
자기들 방식대로 잘라놔서
늘 불만스러운데
이 단골 미용실은
내가 말하는대로 잘라준다.
가격도
일반 미용실의 절반이다.
일거양득인 셈이다.ㅋ
이젠
단골이 되다 보니
아는 사람끼리
잘 알아준다는 이유로
그'배려'라는 것이 등장했는데~ㅠ
앙꼬 없는 찐빵 열심히 사갔더니
찐빵 주인이 고마움의 표시로
앙꼬 넣은 찐빵을
만들어 준짝이 되버렸다.
한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
가격이 저렴하니
다른 미용실 한 번 갈 걸로
두 번 갈 수 있는데
숱 적당히 쳐 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쳐버려서
일주일 이상 거울 보고
투덜되게 만들어 버렸다.
글쎄
그 단골 미용사의 마음은
내가
한달은 더 넘기고 오도록
배려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매번
내가 이렇게
당부를 해도
커트는 물론 퍼머도
그 포커스를 슬슬 벗어나고 있다.
단골을 바꿔야 할 때가 온것 같다.ㅠ
여튼
절대 염색하지 말라는
단골 미용사의 충고를
여러 번 당부처럼
듣고 버텨봤다.ㅋ
오십의 중반을 달리는 나이에
나는 갈색 염색을 한다.
머리가 고집스럴만큼 까매서다.
사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늘 보아왔던 머리색이라.
주위에서 퍼머를 해봐라,
갈색 염색을 해봐라,
그러면
사람이 부드러워 보일 것 같다..
마지 못해(?) 했는데
모두들 훨씬 보기 좋다고..
어느새
나도
퍼머한 갈색 머리에 익숙해져서
퍼머와 염색을 몇년 주욱 했다.
그런데ㅋ
지난 봄,
집에서 염색한다며
비닐을 뒤집어 쓴 것도 잊은 채
청소를 열심히 하느라
그만
시간을 배로 초과해버렸다. ㅠ
놀라서
후닥 샴푸를 했는데
이미 머리는
황금색으로 탈색되고
머리결은 수세미에
완전
싸구려 양아치 머리가 되버렸었다.
후닥 단골 미용실로 달려갔다.
머리가 다 자랄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ㅠ
친척 어른들한테
한소리(?) 들을 때마다
변명 같은 설명을 ㅠ
커트를 하며
반년 넘게
염색 머리를 잘라내니
백설 공주 마냥
하얀 얼굴에 새까만 머리로 돌아와서
퍼머를 하려고
"것봐요오,
이리도 좋은 머리결을
이젠 염색하지 말아요오"
그런데
퍼머를 해놓고 나니
미용실 주변의 사람들과
내 머리색이 대조적인 거다.
넘 새까매서 말이다.
처음,
주위의 충고로
염색 한번 해보려고
마트에서
염색약을 보고 있는데
매장 직원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멋내기 염색하시려면
그 검은 염색 다 빠져야 할껄요?"
내가
새치 전용 흑색 염색이라도
한 것처럼 충고해줬었다.ㅋ
그 얘기를 해주었더니
모두들
끄덕하며 웃었다.
미용사도
웃으며 한마디 건넨다.
"담엔 퍼머할 때, 코팅도 해요."
"네에~ㅋ"
새까만 머리에 화장
(원래 안한다. 스킨,로션도 안바른다.)기 없어도
뽀얀 피부인 얼굴과 까만 눈썹을 보고 있자니
리즈 테일러가 떠오른다.
인물로는 어림 턱도 없는데
머리 스타일은 정말 딱이다. ㅋ
그 관점이라는 거 말이다.
허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믿지 말아야할 것이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라서 말이다.
그래서
사람 사는 일에
단정을 지으면 안되는 거다.
개학을 하니
또 얼굴 보자는 전화들이..
어구우, 이눔의 인기는 ㅋ
마딸의 중학교 친구들중
과학고를 간 친구가
이번에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한 해 먼저 가는 만큼
그 노력을 많이
축하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축하 듬뿍 해주고
밥도 얻어 먹으려고..
또딸의 중학교 배정표를 들고
또딸 대신 학교로 갔다.
안내 서류들을 챙겨
약속 장소로 걸어가기로..
예전에
친구들하고
이 거리들 참 많이 걸어다녔다.
(그래서 살이 안 쪘나보다.ㅋ)
선릉을 지나 추억이라는 거
곱씹으며 역삼까지이.
1995년, 룰라, 김건모, P.까아(스),
L.A Palms, 로스트로포비치,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엘란트라,
이정하 詩, 미켈롭 맥주..
한여름 장대비마냥
말끔하게 씻겨버린
지나간 일들이다.
방학동안
세끼 밥 해대며 '방콕' 한 탓일까?
갑자기 걸으려니
아고오, 도저히 못 걷겠다.
예전에
또딸이 돌박이일 때,
시어머니 모시고
성산 일출봉을 올라간 때가..
높아서
왠지 오르고 싶지 않으시다는 걸
금세라고!
우겨(?) 모시고 올라갔었다.
오를수록
이십대와 사십대의 몸이
현저히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칠순을 넘긴 노인이
며눌 말에 용기 내어
일출봉 정상에 올라서는 일..
어찌나 죄송하던지.
돌박이를 남편과 번갈아 안고
오르고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힘듦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내려와서도
'죄송하다'를
연발하며 굽신대던 일이
피익, 미소 싣고 지나간다.
몇년 전 가을,
우리 가족끼리
다시 일출봉에 올랐다.
자식들은
펄펄 날으며 올라가고
나도 나름 오르기 좋았다
과거 Vs 현재는 같은 상황이라도
결코 기억이 일치하지 않음이다.
'그저 그때의 생각은
진정 이러했었노라' 라는 거다.
고교 3년 내내
회장을 하며
성적 또한 좋아서
엄마 어깨까지
으쓱하게 하던
아들의 입시 좌절로
상심한 친구는
동대문에서 성곽길 걸어
길상사에 가잔다.
울 마딸 사감질 하려면
집에서
stand by 해야 하는데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만나러 나갔다.
작정한 듯
점심부터 먹자고 하더니
식사를 마치고
이내 법당에서
108배쯤은 거뜬히 해치웠다.
난 친구의 기도
방해되지 않게 시주하고
짧은 기도 후 앉아서 기다렸다.
화요일엔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봉헌하고 왔는데..
경건하기로 치자면
성당, 법당의 무게는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한계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에
사람의 간절함을,
그 속의 절대자를 향해
내 존재의 무엇을
염원할 수 밖에 없는 점 말이다.
올겨울 내내
서울에는
눈 같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파가 시작되더니
오후부터 느닷 없이
눈발이 굵어지고
쌓이도록 오래 내린다.
늦은 감은 있으나
겨울의 할 일은 다하고
물러날 참인가 보다.ㅋ
또딸이
하도 눈이 안 좋아
하드 렌즈를 맞추고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녀석이 우산을 가져가자는 걸
"얌마, 눈은 맞아줘야 하는 거야!
정 심하면 모자를 쓰더라도.."
핀잔을 주고
도서관 보냈는데
에구
눈이 넘 많이 내린다.
녀석의 귀갓길이
좀 걱정스럽다.ㅠ
다음날
아침 베란다의 버티컬을 걷으니
쌓였던 눈은 흔적도 없다.
정말
LTE급 세상이다.ㅋ
요 근래
서너 편 정도인가?
틈틈이 프랑스 영화들을 봤다.
세기와 동서고금을 초월한다는
청춘의 사랑 풀이가
내가
청춘이던 시절에 보던 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프랑스 청춘들의 사랑은
머리와 가슴이
일체가 되야 하는 것 같다.
가슴이 동하는 대화가
아주 중요하다는 거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야말로 소시적에 본
남자는 소르본느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여자는 미용사.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
미용실 안에서
뜨게질을 하는 미용사에게 반해서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저녁이면
소르본느의 친구들과 모여
토론과 대화를 나누지만
미용사인 여자는 도통
그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여
자연스레
그 그룹들에서 멀어져 가고
남자는 몇 번인가
보듬어 보지만
침묵하며
뜨게질만 하는 그 여자에게서
무기력을 느끼며 둘은 멀어져 간다.
며칠 전
본 영화들도 맥을 같이 한다.
가슴이 동하여 사랑을 시작하지만
대화로 일체가 되지 않으면,
삶을 공유하는데
공감대가 사라지면
그들은
책임이나 통념 또는
상대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 장점 따위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
즉 개인의 행복에 대해선
객관적 잣대질이 무용하다는 것.
우리네 부모식 사랑 방식과는
아주 거리가 먼.
물론
우리 부모들의 사랑이
다 그렇다 할 수는 없지만
늘 '보편적'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보면..
'남편 밥 먹는 여자가 젤 행복한 거다.'
이 말은
무시무시한 남존여비와
남자의 가부장적 권위주의다.
남자인 남편은
돈을 버는 일로 통치자가 되고
여자인 아내를 최고(?)로 미화시킨
현모양처라는 족쇄에 가둬
복종과 헌신을 강요하는.
대화보다는 도리를,
개인보다는 공동체(친족)
다수의 평화를 철칙으로.
자칫
존재감을 상실케 하는
통념적 희생주의다.
변화를 생각하기는 하지만
우리 세대도
진부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면까지 권위, 복종과 희생이냐면?
그렇지도 않으니 말이다.
세월에 맡겨
그저
남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참는 것 같다.
반발이나 토시를 다는 일에
"아이, 어떻게.."
하면서 끙끙 앓아대는 모습들이란.
그러다
성토라는 것이
튀어나오면 양쪽 다 한결같이 '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남들도 다 그러고 사는데 뭐...'
또는
잘못인건 알지만
왠지 지는 것(뭘 그리 이기고 싶은지 ㅋ)
같아 사과하지 못하고
(그래서 완전 패배자가 된다는 걸 모른 채)
일축되어버리기도 한다.
물론 듣고 있자면
양측의 말이
다 일리는 있는데
왠지 답답하다.
누구든 부분적으로라도
해결하자고 총대를 들면
이들은
뒤에 숨어서 힐긋거리고
그 총대의 완성도에 따라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비겁하고 소심한 이기주의자들이 된다.
하여
우리의 국민성을 지적하자면,
'남에 의해서 나를 완성하는
무색(자기 색이 없는)의 선한 사람들?'
관습, 통념이나 타성에
익숙한 삶이라는 것은
참으로
단순하고 지루한 삶 아닐까?
자기색이, 개인의 행복이
결코
공동체의 행복을
저해하기만 하지는 않을텐데.
단지
공동체의 화합 앞에서
선택권을 나도 갖는 일인건데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남이 해야하니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거하고는
정말 천지를 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양각색의 사람들 속이라
'개인주의의 정착' 이라는 것도
사람 나름일 것이다.
조용히 비가 내린다..
2월의 비는
우울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엄마가 요양 병원에서
대학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뇌출혈이 있으셨단다.
그리고
중환자실로..
큰 병원의 응급으로
실려가시는 일이
벌써 세번째.
두번의 응급 처치와
중환자실을 거쳐
다시 요양 병원에 들어가시면서
엄마는 당부의 당부를 하셨다.
"제발 부탁이다.
세번째는 살리지 마라.
정말이지
이렇게는 더 살고 싶지 않거든."
엄마답다.
의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어쩜
생명을 더 열악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극단의 이기주의를 발동.
엄마의 당부보다는
우리의 자식된 도리를 우선으로..
언니네 부부와
우리 부부가 마주 앉았다.
엄마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발언은 냉정하다는(?)
내가 꺼냈다.
형부와 남편은 한숨만..
우리 자매의
결정처분만 듣고 있었다.
매년 CT와 MRI를 찍었다.
약 처방도 꾸준히 해왔다.
물론
이번의 갑작스러운
뇌출혈은 치료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호수를 끼워
뇌수술을 하겠다는 의지다.
뇌경색, 심근 경색, 고혈압과 당뇨의
치료는 서로 상반되서
어느 곳 하나
공격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민감한 치료라는데
아니
엄마에게는
치료라는 말보다 완화가 맞다.
그런 팔십이 넘은 노모에게
목숨을 건 뇌수술?
수술은 반대하고 싶었다.
그럴바엔
차라리 편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다.
수술은 접기로 하고
부은 뇌가
가라앉기를 기다리자.
혈압이 많이 올라갔단다.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엄마,
그리고
싸늘한 손.
번갈아 만져 따뜻하게 해줘도
이내 얼음장 같았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으니
그제사
눈물이 쏟아진다.
"복도 지질이도 없는 양반이다.
어찌 운명하는 일도 저리 힘이 들꼬."
열흘이 넘었는데
여전히
엄마는 의식이 없는 상태다.
가엽고 안타까워 목이 멘다.
그런 중에
남편은 상갓집에 가야 한다며
양복을 바꿔 입으러 들어왔다.
서로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 남의 상가(喪家)에 가는거군.
참나.'
드보르작의
'나의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가
귓속에서 감아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