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번째 봄
마흔번 째 봄
함민복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꽃 지는 봄산처럼
나도 누구 가슴
한번 울렁여 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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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Johnson의
♬) Better Together 가 나온다.
으음~ 조오~~타♥
나에게는
쉰 세번째 봄이다.
노안경 없이
문자 한번 날리려면
오만상을 다 찌부려야 하고
머리 속에 담고 있는 생각과
입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아지며
잠 자면서
코 고는 일도 다반사에
머리숱은 많은 대신
정수리부분의 속알머리가 없어서
앞머리를 살려야만
푹 꺼진 머리 커버되는..
스무살.
슬프게도
몸은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
글치만
가슴은 여전히
스무살마냥 뜨거운 건 진실.
느닷없는 함박눈,
등굣길의 분주함에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회색 하늘을 희롱하는 아침.
진정으로 개학.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또딸의 입학식에 가 앉아 있으니
예전
내 고등학교 배정이 생각났다.
같은 중학교를 다니던
우리 세 명의 친구는
각기
다른 학교로 배정받았었다.
또딸이 입학한 학교의
고등학교로 배정 받은 친구는
천주교 신자였다.
(머리도 기를 수 없는 단발 규정에)
원불교 학교로
배정받았다고 난리난 듯
펑펑 울기까지..
지금 생각하면
뭐 울 일도 아니건만
서로 큰일 난듯 공감.
눈높이가 같다는 건
여하튼
따뜻한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
어린 것들의 신념이란?
종교적 이기주의였다.
어른들이 지들한테
관대할 수만 없는 이유의
일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이유인지
다른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 친구 고2 때
미국으로 유학 갔었다.
대학생이 되어
한 번 만나기는 했는데
지금은
뭐하고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다.
새삼 귀티가 줄줄 흐른
공주 같던
그 친구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 깊어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있지만
아버지가 선택해 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 같다고 했던..
그 친구에게 있어
아버지의 사랑은
살살 녹아내리는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족쇄였던 것 같다.
그 족쇄가
그 친구에게
행운의 부메랑이 되었길 빌고 싶다.
우리 철부지 시절의 아이돌들.
한국의 산울림, 일본의 히데키,
미국의 숀 캐시티,
고1때 내한한 레이프 가렛
홍콩의 진추하와 아비
(그가 이끄는 winners라는 그룹)까지.
60년대에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공연때
당시의 여학생들만큼
우리들에게
L.가렛은
뭔가 출구같은 존재였었다.
이 친구에게
"미국에서의 L.가렛은? "
하고 물었었다.
어린 시절이
어이 없다는 듯 웃고 말았었다.
그러나
시커먼 교복과
귀밑 1cm 규정의 단발 머리에
획일적 사고의 교육을 주입받던
우리에게 그는?
분방한 트레이닝복과
나이키 운동화와를 신고
감정을 맘껏 분출하던
라이브 자체가
획기적인 무엇이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돌아다 보니
나는
그 한때 한때를
잘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ㅋ
덕분에
젊은 날 탐닉했던
책,음악, 영화, 미술, 연극, 여행 등등
익숙한 즐거움의 많은 것들에
감동하며
그러한 것들의
새로운 호기심과 관심을
자극하는 것들을 채울 수 있는
(부족하나마) 시간과 돈이 있는
현재가
너무나 감사하고 즐겁다.
즐거움과 삶의 기쁨에 투자할 줄 아는
괜찮은 중년(?)이 된
지금의 내가 아주 좋다.ㅋ
이제
다시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
단순히
생존의 돈 버는 일을 해야한다면
왠지
아주 불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ㅠ
내가 신입생이 된 듯
바쁜 일상의 3월 ㅋ
드디어
초딩 학모 딱지 떼고나니
시간의 여유로움이
좀 생겨서 아주 좋다.
덕분에
몰아치기로 동창들 만나
수다 테러 (?) 지르고
집에 왔더니
결국 또딸 총회에 가 앉아서
감기는 눈을 주체할 수 없었다.ㅠ
마딸네 학교 총회 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지 ㅋ
가여운 울 엄마는
한달이 넘도록
여전히
아주 잠깐의 의식만 있을 뿐이다.
밤중의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는
가슴이 쿵'하기까지 할 지경인데
또딸이 평소와 다르게
휴대폰을 받고 나와서 하는 말.
친구의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친구들과 문상을 가겠다는 거다.
고작
열 세살박이 어린 애가 문상을?
과연
그 친구의 상실감과 슬픔을
정말 위로해줄 수 있을까
젤 우려스러웠다.
자칫
자기 감정 조절 못해
그 친구를 더 슬프게 한다면..
그리고
죽음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너무 이른 것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서
다음 날 아침까지도
보내야 할지에 대해 망설였다.
그런데
하교하고 돌아와서는
멘붕의 얼굴이
되어 꼭 가야겠단다.
친구의 엄마가 suicide했단다.
그 친구,
형이랑 아주 폭력적으로 싸워서
엄마가 힘들어 하더니
그렇게 된 거라고 자책하면서
너무 슬프다며
친구들 모두 와달라고 했단다.
참 아이답다.
엄마가 자식들 싸우는 일로
운명을 달리하기까지야..
애나 어른이나 고인 앞에서는
자신들이
서운하게 했던 점을 떠올려
가슴 저리는 반성을 하게 하는 일은
슬프게도 흡사했다.
마주 하는 동안 치열(?)하게
양보 없이 살다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야
관대함을 발휘하게 되는 일.
내가 요즘 고민하는 한가지.
상대를 언짢게 하는 이의
의도 없는 공격에 대해서다.
공격자가 의도하고
상대를 공격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하려 하지 않았다면
그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헤아려만 주자니
당하는 자만
매번 당하는 꼴로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야 하고
마침내
참지 못하여
언짢은 감정이 표출되었을 때
공격자가 되려
어이없어 하며
더 분노하니
어디서
인내심을 잘라내어
상대방의 행동을 공격이라고
알려주어야 할 지가
아주 곤란하다는 점이다.
배려와 이해의 차이로
구분해야할 텐데
결국은
끼리의 눈높이로 인한 차별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뭐 이를테면
엄마의 눈높이로 본
아이의 문상 같은 것도 그럴 것이다.
각자의 눈높이가 있는 것인데
자꾸
내 눈높이로
다스리려 드는 일 말이다.
건강한 보통의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사고의
눈높이와 나의 높이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불협(?).
"그럼 꼭 가아! 근데 명심해!
절대
그 친구 앞에서 울지마!
대신
손 한번 꼭 잡아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마!
손 잡아줄 때 위로하고픈
니 마음 거기에 다 담으면 되는 거야!"
"알았어."
물론 장례식장에서는
모두들 숙연해졌고
우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고 했다.
반면
몇 개의 중학교로 뿔뿔이 나눠진
친구들은 번개 반창회가 되버렸다.
장례식장에서도
서로 반가워 환호하여
선생님의
몇 번의 주의를 받고서야
진정국면이 되었다고
상을 당한 친구는
남자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단다.
돌아오는 길은
선생님과 아이스크림 먹으며
병원에서 선생님 가시는
지하철역까지 걸으며
담소로 즐겁게..
모두들 오랜만에 만나
금세 흩어져야 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헤어졌단다.
초등 교사는
20대의 젊은 분들에게 적격인 것 같다.
감정의 공감대가 가장 가까운 점을
최고로 들 때 말이다.
슬픔의 당사자에게는
세월이라는 약으로
희석해 가야할 일이지만
문상객이 된
어린 친구들에게는
슬픔의 당사자를 위로하는
예(禮)를 취하게 하고
suicide에 대한 무거운 평가는
아이스크림으로 배제시켰다는 점은
엄마들도 할 수 없는
살아있는 교육이었다고 생각한다 .
산 사람은
또 살아왔던 대로 사는지라
고인 된 이만 더 슬픈 노릇!
사는 일은
이기적인 것이 이치인가보다.
"오늘,
아주 무거운 경험을 했네.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어여
들어가서 일찍 자아."
하며 꼬옥 안고 토닥거려줬다.
또딸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도 진심이었으리라.
"또딸, 그 슬픔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 아닐 수도 있어.
평소 우울증 같은 것땜에
약을 복용하신 것이 과했을지도 몰라.
꼭 ●●이라 단정할 순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 친구를 다시 보게 되도
불확실한 ●●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는 거지.."
"알아! 걔한테는
지금 엄마가 없다는 것만도
트라우마일테니까.."
"내가 직접적으로 겪지 않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접할 수 있는 슬픔이야.
엄마 말은,
친구가 슬픔을 트라우마로
끌고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거야.
넌, 그냥 친구가
잠시는 엄마의 부재가 슬프겠구나
정도만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고
평소처럼 덤덤하게 대해주는 일이
그 친구를 긴 시간의 슬픔에서
좀 더 빨리 벗어나게 할 것 같아."
"끄덕끄덕~"
하며 엄마의 품속으로
애기처럼 파고드는 또딸,
어느 때보다
엄마의 품이 따뜻하고 감사했으리라.
요절한 이의 아픔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명복를 빌어주고 싶다.
엄마 마음으로..
남은 아이들의
정신 건강도 빌어주고 싶다.
여기까지!
더 생각의 꼬리를 무는 일은
넘 우울해서 안 되겠다.
어느덧
3월의 끄트머리.
언제부턴가 세월은 총알을 탔다.
음악 프로에서 DJ가 말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다들 할 말이 많을겁니다.."
맞는 말이다.
사람 사는 일에 '사랑' 빼면
모두 시체인거니까.ㅋ
친구와
독립문에서 시작하는
안산 둘레길을
화창하고
맑은 공기마시며 걸었다.
내려오는 길은
봉원사길로...
그리고
이대 후문을 지나
정문을 통과해
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떡볶이 집에 갔다.
소름이랄까, 전율이랄까..
우리 또래 중년의 여인네들이
드문드문
삼삼오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냠냠하는 일.
친구가 말한다.
어쩜
우리가 가장 축복 받은
세대일런지도 모를 일이란다.
남자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고민 없이
대부분 취업했고
결혼한 여자들은
가정 주부로서
육아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이제
주부이기만 했던 여인들은
아이들이
대부분 대학생 이상이 되니
자신들의 즐기고자 하는
삶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내가 고상하게(?)
정리해줬다.ㅋ
E.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들어서.
우리 부모세대의 삶이라는 것은
단순히
'소유 양식'의 개념이었다면
우리 세대는
'존재 양식'의 개념이라서 그런 거다.
이 떡볶이 집의
변함 없는
튀김과 양념장, 즉석 떡볶이는
우리 젊은 날의
자유로운 관념 속 기억인 거다
나이다움이라던지
또는
단순히 떡볶이라는
틀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처
느끼지 못한 세월들을
생판 모르는 다른 이들의
쪼글함을 보면서
나를 통감해야 하는 일이
살짝 서글펐다.
다시 오지 않을
2015년의 3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