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희망이 외롭다.

쨍쨍하늘 2013. 2. 11. 22:26

희망이 외롭다

                                  김승희

 

 

남들은

절망이 더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다,

희망이란

말을 빼곤

어디에도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세월,

내가 그 여자였을까?

 

상자 뚜껑을 열어

모든 재앙을

세상에 풀어놓고

얼른

상자 뚜껑을 닫아

희망만

겨우

가두어 놓았다는,

희망은,

겨우

희망도 갇혀 있다는 게 정말일까?

 

마침내

아무 희망도 그립지 않을 무렵

남들은 절망이

희망만 없다면

무슨 짓이든

함부로

할 수 있을 것 같고

비애의 독배도

부어라 마셔라,

해바라기 눈동자도

바늘로

콕콕

파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이

환각 같고

희망이

고문 같은데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어차피

희망이란

어차피 말 옆에 사는 것인데

오히려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외로운 순간이 있다

 

희망과 나

세 잎 클로버가

네 잎 클로버인데

도무지

오늘도

누구를 기다리며

희망 때문에

나무 옆에서

둘이 서로

멀리 쳐다본다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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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 있네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 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외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 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