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외롭다.
희망이 외롭다
김승희
남들은
절망이 더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다,
희망이란
말을 빼곤
어디에도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세월,
내가 그 여자였을까?
상자 뚜껑을 열어
모든 재앙을
세상에 풀어놓고
얼른
상자 뚜껑을 닫아
희망만
겨우
가두어 놓았다는,
희망은,
겨우
희망도 갇혀 있다는 게 정말일까?
마침내
아무 희망도 그립지 않을 무렵
남들은 절망이
희망만 없다면
무슨 짓이든
막
함부로
할 수 있을 것 같고
비애의 독배도
부어라 마셔라,
해바라기 눈동자도
바늘로
콕콕
파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이
환각 같고
희망이
고문 같은데
또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어차피
희망이란
어차피 말 옆에 사는 것인데
오히려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외로운 순간이 있다
희망과 나
세 잎 클로버가
네 잎 클로버인데
도무지
왜
오늘도
누구를 기다리며
희망 때문에
나무 옆에서
둘이 서로
멀리 쳐다본다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
***************************************************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아,
절망은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돼지가
삼겹살이 될 때까지
힘을 다 빼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는 걸 뭐
그래도
머리는 연분홍으로 웃고 있잖아,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 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외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 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
희망이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