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대한 속설
희망에 대한 속설
김종제
어떤 이는
얼음을 뚫고 나오는
복수초라 하고
어떤 이는
껍질을 찢고 나오는
매화라고 하고
누구는
둥지에 품고 있는 알이라고 하고
누구는
고치 밖으로 펼친 날개라고 하는데
나는 육신이라는
그 단단하고 두터운
갑옷 속에 감추어놓은
한없이 부드러운 마음 같은 것이라고
살을 베어 밥으로 덜어주고
그의 입속에 들어가
피를 뜨겁게 데워주고
옷을 벗어 방으로 건네주고
정신을 잃게 만들어주고
몸으로 안아
절 한 채 되어주는 것
그 속에 아궁이 하나 만들어놓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도끼로 패서 불을 지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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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다..
어쩜
이리도 잘 흘러가는 걸까.
방학동안
한파를
온 가슴으로 안은 채
아침 등교길에 나섰다.
개학과 동시에
나는 오후에 등교..
아이들의
정신력이라는 것도
개학과 방학이라는 개념에
좌우지하나보다.
늦잠으로 자리를 비우던
어린 것들도
빼곡히
자기들 자리를 채우고..
졸린 대신
동글한 눈으로 연필을 들었다.
그러나
연필을 들고 있는
이 시간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알 리 없는 모습들..
개학,
그리고
종업식을 일주일쯤 앞두고
발가락을
방문 모서리에 찌었다.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아이들이 물었다.
다치게 된 상황을 설명.
한번쯤은 경험했을..
아이들은 알 것 같은
동병상련의 느낌을
얼굴 가득 뿜어냈다.
누군가는
그래서
발톱이 빠진 적이 있다고 했고
다수는
그 느낌도 알 것처럼
고통의 탄성을 재연하기도 했다.
절뚝절뚝
걷기가 며칠 째.
반마다
아이들이 물어봐 준다.
"선생님, 발은 어떠세요?"
"아아, 고마워..
처음보다 나아진 거 같아요."
살맛나는 교류인 거다.
이런 와중에서도
아주 감사한 변화가 있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늘 수업중에
자기의 교재와 연습장에
빈틈 없이
그림과 암호같은 낙서를 해대며
시간을 떼우던
한 아이가 연필을 들었다.
이 아이에겐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도저히
선생의 책임감에서 열외인지라
그 어머니와 통화를 해야했던 아이다.
그 어머니가 그러셨다.
"우리 아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다 알아요.
하지만
꾸준히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엔 되지 않을까요?"
그 어머니는,
아이가
하루에
아니
일주일에 한 문제라도
건질 수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 어머니의 현실성 떨어지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질문이 넘치는 날은..
이 아이는,
무궁무진한
자신의 환상의 세계로
더 깊이 빠져드는 날이었다.
연산의 규칙 대신
자신의
절묘한 수식으로 엉터리 답을 내는..
이 아이의 교재를 채점하려 들면,
대체 이런 수식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궁리하게 하곤 했었다.
오랜 습성의 역습이라고나 할까?
이 아이가 속해있는
학년의 수업을 맡고,
반년이 다 되가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불모지' 였다.
이 한 시간의 수업은
3시간의
스트레이트 수업보다도 고됐다.
될만한 아이부터
하나씩 헤쳐나갔다.
반년째가 되어가자
절반이
간신히
평균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 아이에게 다가갈 만큼
시간이 생기기도 해서
기초가 되는
새 단원이 나오면
앉혀놓고 단둘이 공부해봤다.
백점을 맞을 수 있는
성취감을 쥐어주고 싶어서였다.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동기부여가 최선인 거니까.
이 아이에게도
그렇게
반 년 이상이 지나가고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책 여백이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하고
숙제도
내달라고 하고 질문도 한다.
하루쯤은
평소와 다르게
잘하고 싶은 날이 있는 것과는 달랐다.
이런 경우는
소설에나 등장하는 일이어야 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내도록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자꾸 미소가 돌았다.
가족들과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읊어댔다.
무슨 행운을 거머쥔 것 같았다.
이런 성취감 때문에
뭉클하게
보람이라는 감정이
일상 속에 자리를 트는 거다.
세상 기분 좋은 일 그 자체인 거다.
다른 학년 수업 시간.
이 아이는
아이답지 않게 맹랑했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부터
슬그머니 반말이었다.
어른에게 반드시 존댓말!'
이라는 원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튼
거슬려서
내가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가 더 만만하게 여겨졌는지
대놓고 반말질이었다.
결국,
서로 존중 차원에서
존대할 것을 권했다.
"왜에? 난 우리 엄마한테도 반말 하는데?"
"난 니 엄마가 아니잖아요?
그럼, 넌 담임 선생님께도 이렇게 반말 해요?"
"아니이!"
"그럼 나한테만 반말 하는 이유는?"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어서.."
서로 존대를 하는데만
석달 이상이 걸렸다.
말 꼬투리도
한번 잡으면
질기고 고약스럽게
물고 늘어졌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공부도 하지 않은 채
시위를 일삼았고
불쑥불쑥 울어댔다.
처음엔 당황하여 달래봤고
그 익숙한 시간들에
내가 길들여지는 대신
이 아이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요,
코맹맹이 소리하면서
몸을 꼬아대가며
자기만 바라봐 주길 원하는 친구들을
보면 머리서부터 소름이 쫘악 돋아요."
"왜요?"
아이들이 물었다.
'상대적 관계 무시하고
일방적이며 이기적 요구를 하는 것 같아서다.'
가족끼리는
용서와 이해가
우선으로 가능하지만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여타를 가리지 않고
나부터 먼저라는
우선적 관심과 선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양보, 타협, 배려 같은 상호작용으로
인정 받는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처벌을 우선시 하기도 하면서
원만한 상호작용을 배워가는 곳이라
내가
이 자리에 무엇을 하려고 있는지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서툴다고 이해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서툼을 개선해 가야 하는 것이다.
학교.
아이들이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하려고 발을 내민 곳.
집단적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곳.
다름에서 공평성을 배우는 곳..
집처럼
누군가 나만을 생각해주길 바란다면,
내가 얻고 싶은 사랑과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는 물론
많은 것들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배움의 과정에 선
이들은 자주
'상처 받았어..'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아이는
이 아이 어머니에게 받은
당혹스런 문자를
자꾸
각인시키게 했다.
중간에
대체 강사로 들어갔고
인수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다.
엄밀히는
내 잘못은 아니다.
전임 선생님의 실수였다.
새로 맡는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수습이 먼저라
앞,뒤 자르고
그 어머니에게 문자를 드렸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삭제되어
교재 전달이 하루,
이틀 늦어지는 양해 문자였다.
기분은 언짢을 수 있어도
그닥 큰일 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연속해서
6통 가까이 문자가 왔었다.
'왜. 우리 아이여야 하죠?'
'왜, 하필 우리 아이여야 하냐구요?!'
'왜, 우리 아이가
이런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거죠?!'
'왜냐구요?'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었다.
얼른 전화를 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전화도 받지 않았다.
실수를 인정하고
대책 방안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듭 사과의 문자가 있은 뒤고
뭣보다
그 어머니는 이런 문자가
그 어머니의 분풀이 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분풀이로
교재가 당장 올 것도 아니라면,
화는 나더라도
자신의 인격을 위해,
품위유지 차원이라도 좋고
차라리
아이에게 더 관심 갖고
애써달라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이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말투라고 여겨지는
"왜요? 나는 이러고 싶은데요..
그래서 그게 뭐요?
그건 나하고는 상관 없는데요?
나는 그렇게 하기 싫다니까요.."
이 아이는
자기가 놀고 싶어하는 친구가
자기를 피해서
열심히
나의 교실로 달려오는
이유를 여전히 모른 채,
그 친구에게
자기를 두고 먼저 갔다고
여러차례 따지자,
그 친구도 참아주는 것에
화가 났는지
반발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결국
이 아이는
또 자기의 분을 못이겨
펑펑 울어버렸는데..
결과?
조용히
자기 눈물을 훔칠 때까지
아무런 주목도 받을 수 없었다.
슬프게도
이 아이는,
이런 잦은 반복에도
쪽팔림(자신의 인격에 대한 평가)을
정말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질문을 말로 하면
다른 친구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
손을 들고 있으면
내가
그 친구들 옆으로 가서
도와주기로 했다.
이 아이에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때는 찬스' 를 제공한 꼴이 됐다.
자기가
먼저 손을 들었는데
내가
나중에 손 든 친구에게 먼저 갔다며
펑펑 울거나
그런 이유로
의자에 드러눕듯이 앉은 채,
뒤, 옆 친구의 공부를
방해하며 시위(?)했다.
그렇다면
다른 먼저 손 든 친구보다
자기에게 먼저 오게 됐을 때,
그 친구에게
먼저 양보해야 하는 것이
이 아이의 원칙에 맞는 거지만
그럴 때도
자기에게 먼저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이 아이의 모순이었다.
그런 일로
나의 양해를 구하는 말이 수도 없었고
이 아이를 향한 배려 차원으로
먼저
다가가기도 했건만
여튼
자기가 먼저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통하지 않았다.
"일부러
다른 아이에게
먼저 다가간 것도 아니고
너에게 오는 길에
아주 잠깐 대답해주고
올 수 있는 거 아니냐?
아니란다.
자기가 기분 나빠서 안 된단다.
"다른 친구들도,
지나가면서
너에게 먼저 대답해주느라
순서가 늦어지지 않니?
그럴 때마다
다른 친구들도
너마냥
대단한 손해를 입은 것처럼
펑펑 울어야 하니?"
모른단다.
그러나
자기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우긴다(?)
"너는 손을 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너의 공부에 집중하는 대신,
교실을 둘러보며
선생님의 동선이 옳은지의 여부와
너에게
먼저인가만 바라보고 있는 거니?"
"동선이 뭐예요?"
"선생님의 움직이는 거리요."
"움직이는 게 뭐예요?"
"다른 친구한테서 너에게 오는 거요."
"다른 친구 누구요?"
"매 시간 다를 거 아니겠니?"
"왜요?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다른 아이들이
또 시작이라는
짜증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아이 입가에는 미소가 돈다.
고약하다.
관심에 굶주린 이 아이가
좋아지길 바라면서
일 년 가까이 독려&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오랜 인내의 시간은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게 하고 말았다.
"좋아!
그러니까
너는
지금
내가 너보다
다른 친구에게 먼저 간 것이
화가 나서 내게 질문을 안할 작정인 거지?"
"......"
뾰루퉁해서 바로 울 자세다.
"난 다른 친구들 도와야 하는 시간도 부족하니,
지금부터 셋을 셀 거야.
그때까지
니가 질문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간다!
하나! 둘! 셋! "
하고
다른 친구들의 질문을 받으러
이 아이 앞을 지나쳐버렸다.
이 아이는
엎드려 펑펑 울었다.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달래주라는 알림이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이 반복되는 지루함에
교실의 누구도
이 아이에게 반응하는 대신
오히려
더 조용히
공부에 집중하게 만들어버렸다.
이 아이보다
더 심한 이유로
나와 긴 사투(?) 끝에 백기투항하고
나의 평정기에 들어선,
같은 반의 골머리 1호여서
담임 선생님께
하루도 안 빠지고 혼난다던
여학생이 이 아이에게 말한다.ㅋ
"야, 너, 우리 반에서는 안 그러면서?
왜 여기서는 이러는 거야?"
얼마전으로 치자면..
진짜
사돈 남 말 하는 격이지만ㅋ
이 여학생 정말 달라졌다.
내 교실에서는
남에게 방해되는
언성이나 이기적 응석거림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도 이 여학생의
발전된 변화에 기뻐하지 않으셨을까?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법이니까.ㅋ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를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말해줬다.
울 마딸은 어려서 고집이 셌다.
자기 뜻대로 안되면 길에서
'으앙~'
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시위했었다.
그러면
길 가던 인정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부추겨 세워주려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 아이 엄마구요,
그냥 내버려두셔도 되요.."
그리고
마딸을 향해서는,
"아닌 건 아닌 거야.
운다고 달라질 건 없어!
여하튼
이건 절대 안되는 일인건 분명해.
그러니
니 맘 풀릴 때까지
실컷
원 없이 울어.
그건 엄마가 기다려 줄 수 있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아닌 건 아니라는 거 알아야 한다.
마딸은
그렇게 울다
바닥에서 스스로 포기하여
일어나려는 눈치를 보이면
얼른 부축해주곤 했다.
말귀가 통할 무렵에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했다.
말빨로 열심히 설명하려 들면 ㅋ
나의 속사포 말귀보다
말머리의 한줄 포인트로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했다.ㅋ
이런
나의 양육 방식으로
잃은 것들도 많을 거라 확신한다.
어느 순간,
신의 한 수는 있을 수 있어도
어찌
엄마라고
자식을 완벽하게
키울 수 있단 말인가.
내 자식들은
엄마의 단호함에
타협하려드는 대신
일찍
포기하는 법을 배웠을 수도 있고
자신들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은
엄마가 모르게 하는
일면도 있었을 것이고
나름의 시행착오로
판단의 중용을 가리며
성장해 가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
엄마의 양육 방식에 있어,
나름의 최선이라는 것에 기대할 뿐
다 모르는 것을
깊이
자책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도 가물한
힐러리의 '집 밖에서 더 잘 크는 아이들'
책이 생각나는 건
그 제목 때문일 것이다.
내 아이만
자꾸
맨 앞줄 한 가운데에
세우려 들면
편법(도 끝이 제법 빠르게 온다.)이
동원되지 않는 한,
내 아이는
그만큼 맨 끝으로
밀려나게 될 것은
시필귀정인 거다.
드라마 열심히 보시는 어머니들.
막장 드라마 일색인 TV도
그것만은
선명하게 알려주는 것 같던데요..
오늘은
17학년도 학사일정이
정리되는 마지막 토요일.
지난 일년간
이 방은
나만의 정리 공간이어서
행복한 공간이었다.
18학년도에는
토요 근무를 안할 거라..
마지막 출석 체크를 하려고
방을 나서다
나는 기억을 못하지만
나를 알아보시는
한 선생님과 만났다.
"아이들과는 잘되가고 계신가요?"
"괴물 안 만들려고 아이들과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내 뜻을 알아들으셨는지
'화이팅' 손동작 취해주시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신다.
나의 이런 폭탄(?) 제거도
언젠가는 한계가 올 것이다.
설 연휴 즈음
종강에 환호하고
설에 들뜬
아이들이 또 투덜댄다.
지들의 세뱃돈은
바로
엄마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고..
어른이 되면 알 거다..
그게 결국
엄마 돈이라는 것을..
우리의 정서는 품앗이거든 ㅋ
'주고 받고 쌤쌤이'
이거
한쪽이 기울기 시작하면
서로의 정서도
빈정이 상하기 시작해서
우리 엄마들
계산기 동원하게 한다.ㅋ
예전에 61층 짜리
마카오 타워의 유리바닥 ,
그 몇 년쯤 뒤,
101층 타이페이 타워의 유리 바닥,
도저히
아래가 훤히 보이는
그 유리 바닥 위에
설 자신이 없었다.
이번엔
117층 롯데 타워 유리 바닥..
야경이든,
대낮이든 후덜덜..
이제 못하면
영영 못한다고
자식들이 잡아 당기는 바람에
간신히
하늘 보고 가족 인증사진만 Shot..
그러고 보니
자식들 땜에
용기 낼일이 참도 많았다.
31층으로 식사하러 갔다.
전망도
아, 네모네였는데
식사 메뉴도 좀 아니어서..
과한(?) 용기를 내서
그런지
노인마냥 어질어질한 하루였다.
일주일 가량
지도안 쓰느라 뼛골 빠지고
공무원 채용 신체검사도 받고,
새학기
OT 마치고 재계약을 하고,
제출 서류 사인 완료.
그리고
메일로
다른 제출 서류 보내고
지도안도 보내고 나니
녹초가 되버렸다.
한낮인데도
쇼파에 퍼져서
내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잤다.
2월의 마지막 3일.
온가족 여행은
모두의 시간 관계상
또 국내 여행으로..
작년 1월에 이어 다시 부산행.
그러나
이번엔 여행지라기보다는
stop over다.
부산역 근처에서
예약한 렌터카를 타고
남해로 달려갔다.
해안 도로를
오래도록 달려가 만난
'다랭이 마을' 괜찮았다.
그런데
생전 처음 먹어본 멸치쌈밥.
서울서
여기까지 달려온 거리만큼
이색적이었다.
그리고
인적 드문 밤길을 달려
친척 오빠네가 사는 통영으로 갔다.
어느 때보다 풍성한,
주인 인심 듬뿍한 식사를 대접 받았다.
Lugi.
우리 부부는
한번으로 충분했지만
자식들은 아니어서
미륵산 정상을 향하는
케이블카가 시쿤둥했다.
동양의 나폴리라..
Story가 와닿지 않았다.
유람선을 타고 한려수도를 돌았다.
동네잔치 같은 여행 느낌이랄까..
해금강을 둘러보려고
거제로 향했다.
섬과 바다의 선이 깔끔했지만
뿌연 하늘과 밋밋한 겨울의 산,
푸욱 담가보거나
품을 수 없었던 바다는
여행에 절대무익했다.
거가대교를 건너
부산으로 들어서자
북적대는 도시로 돌아온 익숙한 느낌.
내년엔
꼭 좀 머얼리 가는 걸로!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죙일 비가 내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뭣보다 '미투'
이런 슬픈 악습의 고리는
반드시 청산되기를 바라며..
안녕. Feb